출정에 앞서 인증샷.
소소한 인증샷 2.
통영용화사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용화사가 소유하고 있다. 신라 선덕여왕 때 은점(恩霑)이
미륵산 중턱에 절을 짓고 정수사(淨水寺)라 하였는데, 고려시대인 1260년(원종 1)에 산사태로 허물어진 것을 3년 뒤
자윤(自允), 성화(性和) 두 화상(和尙)이 미륵산 제3봉 아래로 자리를 옮겨 짓고 천택사(天澤寺)라고 하였다.
1628년(인조 6)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1752년(영조 28)에 벽담(碧潭)이 다시 짓고 용화사라 하였다.
경내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기와집인 보광전(普光殿:경북유형문화재 249)을 비롯하여, 좌측 1칸에 효봉영각
(曉峰影閣)을 차려놓은 명부전(冥府殿), 미륵불좌상을 봉안한 용화전(龍華殿), 강당(講堂)인 탐진당(探眞堂), 선실
(禪室)인 적묵당(寂默堂), 문루(門樓)인 해월루(海月樓) 등 목조건물과 육모정 형태의 종루가 있다. 그 위쪽에 진신
사리 7과를 봉안하고 있는 불사리4사자법륜탑과 효봉대종사 5층사리탑이 있다.
사실 이날 좀 더웠다.
뜰에 놓여진 돌은 '배례석'이라고 한다는군요.
보광전이라 함은 '부처님의 밝은 진리를세상에 널리 알린다'라는 뜻으로,
다른데같으면 대웅전과 비슷한 본관이라 할 수 있다.
이 죽봉의 정체를 모르겠음. 나중에 혹시 짤방으로 쓰일 수 있을까싶어 담아두기는 했는데 문화재로서의 가치는 없는듯.
원래 다른 절들같으면 좌우측면에도 불화가 그려져있죠. 하지만 이 용화사는 아무런 치장없이 바람막이 형태의벽면만
존재한답니다. 뭐 실용적 어쩌구...하면서 조선후기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고하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음.
경내에서 이리 뛰어다녀도 되는건가? -_-
속성 이(李). 이름 찬형(燦亨). 호 효봉(曉峰). 일명 학눌(學訥). 평양 출생. 할아버지에게 사서삼경을 배웠으며,
1913년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귀국후 우리나라 최초의 판사가 되어 법조계에서 일했다. 1923년
한 피고인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후 '인간이 인간을 벌하고 죽일 수 있는가'라는 회의에 빠져 법관직을 버리고
3년 동안 전국을 방랑한 뒤 1925년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에서 출가했다.
출가 후 고승을 찾아 전국을 순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27년 금강산으로 돌아왔다. 이후 밤낮으로
수행을 거듭하였는데, 한번 앉으면 절구통처럼 움직이지 않아 '절구통 수좌(首座)'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법기암 뒤에 토굴을 짓고 들어가 수행하였으며 1931년 도를 깨닫고 1932년 유점사에서 구족계와 보살계를 받았다.
이후 전국의 적멸보궁을 찾아가 한 철씩 보내는 등 정진을 거듭하였다. 1936년에는 당대의 고승 한암(漢巖)과
만공(滿空)으로부터 도를 인가받았다.
1937년부터 10여년간 송광사 삼일암에서 후학을 지도하면서 정혜쌍수(定慧雙修)에 대한 구도관을 확립하였다.
1947년 해인사 가야총림 방장(方丈)으로 추대되었고, 1954년 경상남도 통영군 미륵산에 미래사(彌來寺)를 창건,
1956년 네팔에서 열린 세계불교도우의회에 참가하고 돌아와 조계종 종회의장에 취임하였다. 1957년 종무원장이
되었으며 1958년 종정에 추대되고, 1962년 통합종단 초대 종정에 오르는 등 우리나라 불교계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평소 계율을 철저히 지키고 제자들을 엄하게 가르쳐 문하에서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 경상남도 밀양군
표충사 서래각에 머무르던 1966년 10월 15일 오전에 입적하였다. 다비 후 나온 사리 50과를 송광사와 표충사·용화사·
미래사 등에 나누어 모셨다.
이 정도 약력이면 꽤 끗발있는 분... 밑의 4구도 어떤 의미가 있었는데 찾기가 귀찮아서...
여덟개의 기둥과 팔각의 모임지붕을 한 정자(亭子)모양의 건물이다. 안에는 법종을 봉안하고 있다.
벽화인가, 아니면 세월에 묻은 때인가... 분간할 순 없지만 운치있어 담아봤다.
자 멋도 모르고 하산...
아래부터는 마눌님의 작품이다. 경건히 감상하삼...
종목 : 문화재자료 제296호 (경남)
수량 : 1점(點)
지정일 : 2001.09.27
소재지 : 경남 통영시 봉평동 404
시대 : 조선시대
소유자 : 용화사
관리자 : 용화사
연락처 : 경상남도 통영시 문화관광과 055-650-5363
통영 용화사에 있는 이 현왕도는 비단 바탕에 채색하여 그렸으며, 크기는 가로 83.5㎝, 세로 107.9㎝이다.
현재 판넬 형식으로 보존되어 있는데, 전체적으로 화면의 테두리 외곽은 오염되었고 채색이 바래져 있다.
이 그림의 뒤쪽 상단에는 그림을 걸기 위한 2개의 고리가 있다.화면은 중앙의 현왕을 중심으로 각각 6명의
인물을 좌우에 배치하고 있다.현왕은 비교적 자유로운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고 권속들은 현왕을 향하여
서 있는 형태이다.색깔은 주색·자색·녹청색·군청색·백색 등이 많이 쓰였고 부분적으로 금칠이 되어 있다.
현왕과 권속 뒤에는 3폭의 병풍을 둘렀는데 병풍내의 그림은 녹청색으로 엷게 채색한 산수가 그려져 있다.
화면 하단의 오른쪽에 쓰여진 기록에 의하면 진해(震海) 염학비구(念學比丘)가 은사와 선망부모를 위하여
조선 고종 12년(1875)에 조성했음을 알 수 있다.조선시대 불교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학술적 자료이다.
그런데 실제로 구경은 못했다.